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종이쪼가리

스물셋엔 뭐라도 될 줄 알았어 스물넷엔 조금 늦은 줄 알았고 스물다섯이 되니까 늦었다는 말도 지겨워졌어 책상 위 이력서 구겨서 또 버리고 한 줄 쓰고 찢고 다시 처음으로 돌아가 친구들은 하나둘 명함 같은 걸 내밀고 나는 웃으면서 말해 “나도 곧 할 거야” 그 말만 벌써 몇 번째인지 모르겠어 종이만 자꾸 얇아져 가 아무것도 안 했는데 하루는 왜 이렇게 빨라 시계는 멀쩡한데 나만 멈춘 것 같아 내일 하면 된다고 오늘도 나를 속여 근데 내일이 오면 또 오늘을 핑계 삼아 찢어 버려 다 필요 없다고 내가 쓴 계획들 전부 종이쪼가리 불태우지도 못해 버리지도 못해 내가 살아온 흔적 같아서 스물몇 번째 밤 또 아무것도 안 했어 스물몇 번째 아침 또 아무렇지 않은 척해 내 청춘이 이렇게 끝나도 되나 월세 날짜를 확인하고 통장 잔고를 또 확인해 괜찮다고 중얼거려 누구한테 하는 말인지도 모르겠어 방 한구석엔 사놓고 안 읽은 책들 배우겠다고 적어 둔 취미 목록 몇 장 운동도 할 거고 여행도 갈 거고 뭐라도 만들어서 이름 하나 남길 거라며 적어 놓은 것들은 전부 멀쩡한데 왜 나는 하나도 시작하지 않았지 사람들은 말해 “아직 젊잖아” 그 말이 제일 싫어 아직이라는 단어 뒤에 얼마나 더 숨을 건데 시간은 공짜가 아니고 내일은 예약도 없는데 나는 또 침대에 누워 천장만 보고 있어 찢어 버려 다 필요 없다고 내가 쓴 계획들 전부 종이쪼가리 불태우지도 못해 버리지도 못해 실패한 것도 아니니까 스물몇 번째 밤 또 아무것도 안 했어 스물몇 번째 아침 또 아무렇지 않은 척해 내 청춘이 이렇게 끝나도 되나 잠깐만 나 진짜 뭐 하고 있지 누구도 날 막지 않았는데 왜 나는 계속 못 움직이지 겁이 난다고 말하면 편하겠지 준비가 안 됐다고 하면 그럴듯하겠지 근데 사실은 그냥 귀찮았어 망하는 것도 무서웠고 시작하는 것도 귀찮았어 그래서 종이만 찢었어 계획만 찢었어 시간은 못 찢으니까 찢어 버려 이번엔 진짜로 핑계 적어 둔 종이부터 찢어 버려 아직 늦진 않았다고 위로하는 종이까지 스물몇 번째 밤 또 지나가고 있어 스물몇 번째 나 또 나를 기다리고 있어 청춘을 낭비한 게 아니라 낭비하고 있는 중이야 그러니까 이번엔 하나만 종이에 쓰지 말고 내가 직접 해 구겨진 종이 바닥에 떨어져 하나 둘 셋 치우지는 않았어 아직 할 일이 남았으니까